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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 카이사르의 관계, 리베라토레스의 내전

by story7202 2025.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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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의 관계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군대를 해산하고 들어오라는 카이사르의 요구를 경멸하는 표시로 알렉산드리아에 들어갑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처음에는 임무를 통해 카이사르와 소통하지만, 카이사르가 왕실 여성과 불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카이사르를 직접 만나기 위해 개인적으로 회의를 갖습니다.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혼자 옷을 입고 동생에게 전혀 알리지 않고 들어가 카이사르를 재치 있게 매료시켰다고 기록했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클레오파트라가 궁전에 몰래 들어가기 위해 침대 가방에 묶여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여동생이 카이사르와 함께 궁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알렉산드리아의 군중을 선동하여 소란을 일으키려 했지만, 카이사르에게 체포되어 군중을 웅변적으로 진정시켰습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알렉산드리아 시민 회의에 데려옵니다.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폼페이에 위임한 유언장의 내용을 공개하는데, 이 유언장에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클레오파트라 및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함께 이집트를 공동 통치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기원전 58년 로마에 의해 빼앗긴 이집트를 달래기 위해 아르소네 4세와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공동 통치했습니다.

 

이 결정이 프톨레마이오스 13세보다 클레오파트라에게 더 편향되어 있다고 판단한 포티노스는 아킬레스를 이끌고 2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알렉산드리아로 진군했습니다. 이는 당시 카이사르의 병력이 4,000명에 불과하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그러나 포티노스는 카이사르에게 처형당하고 아르시노에 4세는 아킬레스의 군대에 입대하여 스스로 왕비가 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킬레스는 아르시노에의 개인 스승인 내시 가니메데스에게 살해당하고 총사령관직을 박탈당합니다. 가니메데스는 카이사르를 속여 억류 중이던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직접 협상하고 싶다고 속여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끌어내 군대에 입대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결국 알렉산드리아에는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만 남게 되었고, 이렇게 시작된 알렉산드리아 포위 전은 기원전 47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기원전 47년 1월에서 3월 사이에 카이사르의 지원군이 도착했습니다. 여기에는 페르가몬의 미트리다 테스와 그의 이두마네 안티파트로스가 이끄는 군대가 포함되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아르시노에 4세는 나일강까지 군대를 철수시키고, 그곳에서 카이사르에게 공격을 받아 전멸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도주 중 배가 전복되어 익사했습니다. 가니메데스는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데오드투스는 몇 년 후 아시아에서 마르쿠스 우니우스 브루투스에게 붙잡혀 처형당합니다. 아르시노에 4세는 로마에 있는 카이사르의 승리 기념비로 강제 이송된 후 에베소의 아르테미스 신전으로 유배됩니다. 클레오파트라가 이 일련의 행사에 참석하지 않고 궁전에 머물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데, 아마도 9월 48일부터 카이사르의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카이사르의 집정관 임기는 기원전 48년 말에 종료됩니다. 카이사르는 부하 장교 안토니우스의 도움으로 이 시기에 독재 정권에 올라 프톨레마이오스 가문과의 분쟁을 해결할 법적 권한을 얻었습니다. 과거 클레오파트라의 언니 베레니크 4세가 유일한 여성 군주로 임명되었다고 생각한 카이사르는 당시 22세였던 클레오파트라와 그의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는 동거를 계속했습니다. 키프로스도 기원전 42년 이전에 클레오파트라의 통치하에 있었습니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경 이집트를 떠나 아나톨리아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던 폰투스의 파르나케스 2세와 대립했습니다. 카이사르는 어머니 칼푸르니아가 아직 아이를 낳지 않았기 때문에 아들을 낳을 때 클레오파트라를 함께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고 해석합니다. 카이사르는 나중에 노예 루피오의 지휘 아래 4개 군단을 맡기고 이집트에 주둔했으며,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의 활동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데 사용되어 클레오파트라의 입지를 공고히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클레오파트라의 로마 방문은 카이사르 암살 한 달 전 루페르칼리아 축제의 행사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큽니다. 축제에서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려고 했지만, 대중이 헬레니즘의 폭정에 부담을 느끼고 거절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곳에 있던 키케로는 키케로가 어디서 왕관을 얻었는지 조롱하듯 물었고, 이는 키케로가 클레오파트라를 싫어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분석되었습니다. 카이사르는 3월 15일에 암살되었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가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인정받기를 바라는 헛된 희망으로 4월 중순까지 로마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유언장에서 여동생의 손자 옥타비아누스를 주요 후계자로 지명했고,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로 떠나기로 결심한 시기에 이탈리아에 도착했습니다. 몇 달 후,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독살하고 아들 카이사리온을 그와 함께 공동 총독으로 승진시켰습니다.

리베라토레스의 내전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기원전 43년에 카이사르 암살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선출되어 제2차 삼두정치를 구성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암살자 중 한 명인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로부터 리베라토레스 측의 편지와 시리아의 집정관이자 카이사르의 충성파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후 롱기누스는 이집트가 안팎으로 많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답했고, 돌라벨라는 카이사르가 이집트로 떠난 4개 군단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 군대는 돌라벨라에 도달하지 못하고 팔레스타인에 있던 롱기누스에게 포로로 잡혔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를 지원하기 위해 그리스로 함대를 이끌고 갔고, 클레오파트라가 키프로스 총독으로 임명한 세라피온은 롱기누스로 망명하여 배를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지중해의 폭풍 피해와 도착 지연은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42년 가을, 카시우스와 브루투스는 필리피 전투에서 자살했고,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을 물리쳤습니다.

 

기원전 42년 말까지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공화국의 서쪽 절반을 장악했고, 안토니우스는 동쪽 절반을 장악했으며, 레피두스는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기원전 41년 여름, 안토니우스는 아나톨리아의 타르수스에 사령부를 세우고 클레오파트라를 초대하는 편지를 여러 통 보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안토니우스의 사절인 퀸투스 대리우스의 말에 넘어가고 안토니우스를 만나러 갔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레반트 지역의 영토를 교환하기 위해 회의에 참석했지만, 안토니우스는 사랑에 빠져 개인적인 목적으로 클레오파트라에게 다가갔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와 그의 부하들을 탈라메고스에 태우고 키드로스 강을 따라 타르수스로 돌아오는 길에 이틀 동안 호화로운 연회를 열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이 롱기누스가 아닌 돌라벨라를 도우려 했다고 무죄를 주장하며 안토니우스를 설득해 추방된 여동생 아르시노에 4세를 에베소에서 처형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에 반기를 든 키프로스의 전 총독도 처형을 위해 넘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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