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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어떻게 멜로디를 파괴했나: 쉰들러 리스트와 아방가르드 음악이 주는 기괴한 위로

by content0078 2026. 4. 16.

거의 30년 전쯤으로 기억합니다. 극장에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흑백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보고 난 뒤,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차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적이 있습니다. 참혹한 홀로코스트의 영상 위로 흐르던 존 윌리엄스의 바이올린 테마곡은 너무나도 구슬프고 아름다웠기에, 오히려 그 비극성이 뼛속까지 시리게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현대 음악,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쏟아져 나온 '아방가르드(전위) 음악'들을 찾아 들으면서 문득 묘한 인지 부조화를 겪었습니다. 정작 그 끔찍한 전쟁의 한복판을 관통했던 당대의 젊은 작곡가들은 <쉰들러 리스트>의 OST처럼 아름답고 서정적인 멜로디를 작곡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멜로디 자체를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철저히 파괴해 버렸습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

소음이 되어버린 음악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당혹감

처음 현대 전위 음악을 마주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오디오가 고장 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늦은 밤, 우연히 유튜브 알고리즘에 이끌려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의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나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의 전후 작품들을 헤드폰으로 듣게 된 순간을 잊지 못합니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마자 제 첫 반응은 황급히 헤드폰을 벗으며 "오디오 단자나 스피커가 고장 난 건가?" 하고 기기를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고장난 스피커
고장난 스피커

 

50여 대의 현악기들은 우리가 알던 우아하고 서정적인 선율을 연주하는 것을 완전히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대신 칠판을 손톱으로 강하게 긁어내리는 듯한 날카로운 마찰음, 거대한 벌떼가 귓가에서 윙윙거리는 듯한 불쾌한 진동으로 이른바 톤 클러스터라 불리는 기법, 그리고 멜로디의 기승전결 없이 무작위로 건반을 내리치는 듯한 불협화음을 무차별적으로 쏟아냈습니다.

 

마치 공습경보 사이렌 소리 같기도 하고,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가는 이들의 처절한 비명 같기도 한 그 소리들은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 만큼 위협적이었습니다. 귀를 막고 싶을 만큼 자극적인 이 '소음의 폭격' 앞에서, 저는 이것을 과연 클래식 '음악'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심각한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듣기 거북하고 기괴한 소리를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무대에 올리는 걸까?"라는 강한 반감과 피로감이 앞섰던 것이 사실입니다.

아우슈비츠 이후,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은 기만이다

잔혹한 폐허 위에서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는 것은 뼈저린 현실에 대한 기만이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이 기괴한 소음들의 배경에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 최악의 트라우마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자, 그 불협화음이 전혀 다른 의미로 제 귓가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30년 전 보았던 <쉰들러 리스트> 속 유대인 수용소의 잿더미를 다시 떠올려 보았습니다. 시체 태우는 냄새가 진동하고, 수백만 명이 가스실에서 학살당한 그 처참한 핏빛 폐허. 만약 그곳에서 누군가 모차르트의 경쾌한 소나타나 쇼팽의 달콤한 녹턴을 연주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아마 위로를 받기는커녕, 잔혹한 현실을 애써 포장하려는 끔찍한 기만이나 조롱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가 남긴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는 유명한 말은 바로 이런 감정을 짚어낸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후의 작곡가들 역시 마찬가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기존의 질서 정연한 화성학과 아름다운 선율로는 자신들이 목격한 참상과 찢겨나간 인간성을 도저히 담아낼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철저히 부서지고 파괴된 세상의 민낯을 증언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게 철저히 부서지고 파괴된 형식의 음악이 필요했던 셈입니다.

감정을 거세당한 기계장치의 음악, 그 이면의 슬픔

수학적 수치로 가득 찬 아방가르드 악보. 인간의 감정을 극도로 통제하려 한 처절한 결과물입니다. 전후 현대 음악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기괴한 흐름은 이른바 '총렬주의'라 불리는 극단적인 수학적 통제입니다. 작곡가들은 음의 높낮이, 길이, 소리의 크기까지 모든 것을 숫자로 치환하여 기계처럼 계산해 악보를 채웠습니다.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그저 예술을 수학 공식으로 전락시킨 지적 허영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왜 그토록 철저하게 '인간의 감정'을 음악에서 배제하려 했는지 그 심리적 배경을 들여다보니, 형언할 수 없는 서글픔이 밀려왔습니다. 이 젊은 예술가들은 인간의 뜨거운 피, 맹목적인 열정, 그리고 비이성적인 감정이 결국 파시즘과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괴물을 만들어냈다고 뼈저리게 반성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감정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된 그들은, 역설적으로 가장 객관적이고 차가운 수학적 규칙 뒤로 숨어버렸습니다. 제게 이 복잡하고 난해한 아방가르드 악보들은, 마치 전쟁의 트라우마로 인해 감정 표현 능력을 상실해 버린 한 인간의 굳게 다문 입술처럼 느껴졌습니다.

 

이제 저는 더 이상 펜데레츠키나 슈토크하우젠의 음악을 단순한 '듣기 싫은 소음'으로 치부하지 않습니다. 눈을 감고 이 불협화음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폭격 맞은 건물의 앙상한 철근 뼈대, 사이렌 소리, 그리고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이들의 비명이 날 것 그대로 다가옵니다. 아름다운 멜로디로 현실의 상처를 포장하는 대신, 피 흘리는 시대의 민낯을 청중의 귀에 강제로 들이미는 것. 그것이 바로 아방가르드 음악이 지닌 진짜 가치이자, 그들만의 처절한 위로 방식이었음을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만약 여러분도 현대 클래식 음악의 난해한 불협화음 앞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다면, 그 소리를 멜로디가 아닌 '시대의 다큐멘터리'로 접근해 보시길 권합니다. 전쟁의 폐허 한가운데 서서 그 기괴한 소음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아마도 30년 전 제가 <쉰들러 리스트>를 보며 느꼈던 그 먹먹함과는 또 다른, 매우 서늘하고도 지적인 전율을 경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