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음렬주의의 이해와 역사적 배경

by content0078 2026. 4. 15.

클래식 음악을 듣다 보면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음악처럼 귀에 쏙 들어오는 멜로디가 있는 반면, 불협화음으로 가득하여 다소 난해하게 들리는 현대 음악을 접하게 됩니다. 20세기 초,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조성'이라는 음악의 절대적인 규칙을 깨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부여한 혁명적인 작곡 기법이 등장했습니다. 바로 '음렬주의'입니다.

 

이 글에서는 아널드 쇤베르크가 창시한 12음 기법에서 출발하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점음표, 셈여림까지 통제하는 '총렬주의'로 발전하기까지의 과정과 음렬주의가 현대 음악사에 남긴 위대한 유산에 대해 심도 있게 알아보겠습니다. 서양 음악의 흐름을 이해하고 싶은 분들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개념입니다.

 

음렬주의인 '12음 기법'
음렬주의인 '12음 기법'

음렬주의란 무엇인가?

음렬주의, 또는 시리얼리즘은 단순히 음표를 자유롭게 나열하는 것을 넘어, 음악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들 음의 높낮이, 리듬, 셈여림, 음색 등을 작곡가가 사전에 기획한 특정한 순서로 배열하여 하나의 '음렬'을 창조하고, 이를 곡의 뼈대로 삼는 혁신적인 작곡 기법입니다. 작곡가는 이렇게 만들어진 기본 음렬을 마치 건축물의 정밀한 설계도나 생명체의 DNA처럼 활용하며, 엄격한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인 규칙에 따라 변형하고 조합하여 곡 전체를 전개해 나갑니다.

 

이러한 음렬주의의 근간이 되는 가장 대표적이고 초창기 형태가 바로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아널드 쇤베르크가 창안한 '12음 기법'입니다. 12음 기법이 음악사에 던진 핵심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모든 음의 완전한 평등'입니다. 수백 년 동안 서양 음악을 지배해 온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시대의 음악은 특정 으뜸음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철저한 '계급 사회'였습니다. 예를 들어 다장조 음악에서는 '도'라는 으뜸음이 절대적인 왕의 역할을 하며, '솔'이나 '시' 같은 주변 음들은 끊임없이 긴장감을 유발하다가 결국 '도'로 돌아가 안정을 찾으려는 강한 종속적 성향을 띱니다. 즉, 화성학과 조성이라는 이름 아래 음들 사이에 뚜렷한 권력의 위계질서가 존재했던 것입니다.

 

반면, 음렬주의는 이러한 해묵은 조성의 권력을 완전히 해체하고, 서양 음악의 12개 반음으로 흰건반 7개, 검은건반 5개 모두가 어떠한 종속 관계없이 완벽하게 평등한 지위를 갖는 '민주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하고자 한 급진적인 시도였습니다. 이를 위해 12음 기법에서는 미리 정해둔 12개의 음이 한 번씩 모두 연주되기 전까지는 앞서 나온 특정 음을 절대 반복해서 사용할 수 없다는 엄격한 규칙을 적용합니다. 어떤 한 음이 반복되어 청중의 귀에 무의식적인 '중심음'이나 '으뜸음'으로 인식되는 현상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함입니다.

무조 음악의 한계와 음렬주의의 탄생 배경

음렬주의가 탄생하게 된 역사적 필연성을 이해하려면, 화려했던 19세기말 후기 낭만주의 음악의 끝자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이 시기는 수백 년간 서양 음악을 지탱해 온 '조성이라는 견고한 성벽이 무너져 내리던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 조성 체계의 붕괴 (바그너와 말러의 실험): 리하르트 바그너와 구스타프 말러 같은 작곡가들은 인간의 복잡한 심리와 극한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기존의 음악 규칙을 한계까지 밀어붙였습니다. 특히 바그너는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해결되지 않는 불협화음을 연속적으로 사용하며 끊임없는 조바꿈을 시도했습니다. 반음계가 과도하게 사용되면서, 청중은 지금 듣고 있는 음악이 '다장조'인지 '가단조'인지 그 중심이 되는 '조'의 느낌을 점차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 자유 무조 음악의 등장과 한계: 20세기 초에 이르러, 오스트리아의 천재 작곡가 아널드 쇤베르크는 마침내 으뜸음이라는 '중력'을 완전히 없애버린 '무조 음악'의 세계로 진입합니다. 중심음이 없으니 모든 음이 우주 공간을 부유하는 듯한 극도의 긴장감과 기괴함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곧 치명적인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중 심음이라는 '집'이 없기 때문에, 소나타나 교향곡처럼 대규모의 긴 곡을 기승전결에 맞게 통일성 있게 이끌어갈 '논리적인 건축 뼈대'가 사라진 것입니다. 무조 음악은 자칫하면 단순한 소음의 나열로 전락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 12음 기법의 탄생 : 쇤베르크는 음악을 파괴하려 한 것이 아니라, 붕괴된 옛 질서를 대체할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고자 했습니다.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무조 음악 속에 완벽한 수학적, 논리적 뼈대를 세우기 위해 그가 10여 년의 고심 끝에 1920년대에 발표한 해결책이 바로 초기 음렬주의인 '12음 기법'입니다.

아널드 쇤베르크와 12음 기법의 작동 원리

쇤베르크가 창안한 12음 기법은 작곡가의 순간적인 영감이나 감정에 의존하는 대신, 철저하게 계산된 규칙과 기하학적 매트릭스 속에서 움직입니다. 이는 마치 현대의 암호학이나 유전자 배열 원리와도 흡사합니다.

 

작곡가는 곡을 쓰기 전, 피아노 건반의 한 옥타브 안에 있는 12개의 반음을 무작위로 섞어 자신만의 고유한 '기본 음렬'을 설정합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절대 규칙은 "하나의 음이 다시 쓰이려면, 나머지 11개의 음이 모두 한 번씩 연주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특정 음이 귓가에 맴돌아 '으뜸음'처럼 느껴지는 현상을 완벽하게 차단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12개의 음표 묶음(기본 음렬)은 곡 전체를 구성하는 핵심 세포가 되며,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수학적 방법으로 변형되어 무한한 멜로디와 화음을 파생시킵니다.

  1. 원형 (Prime): 작곡가가 처음 설정한 12개 음의 순서 그대로 연주하는 형태입니다. (오리지널 DNA)
  2. 역행 (Retrograde): 기본 음렬의 순서를 맨 뒤에서부터 거꾸로 읽으며 연주합니다. (마치 비디오를 되감기 하듯 연주하는 기법)
  3. 전위 (Inversion): 기본 음렬의 음정 간격을 거울에 비춘 것처럼 위아래를 정확히 뒤집어 연주합니다. 예를 들어, 원래 음렬이 첫 음에서 '반음 3개'만큼 올라갔다면, 전위 형태에서는 '반음 3개'만큼 내려가는 식입니다.
  4. 역행 전위 (Retrograde Inversion): 위아래를 뒤집은 '전위' 형태의 음렬을 다시 맨 뒤에서부터 거꾸로 연주하는 가장 복잡한 형태입니다.

작곡가는 이 4가지 형태를 바탕으로 시작 음을 다르게 설정하여 총 48개의 다양한 음렬 조합(12음 매트릭스)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무질서한 불협화음처럼 들리지만, 악보를 분석해 보면 단 하나의 음표도 허투루 쓰인 것 없이 완벽한 거미줄처럼 엮여 있는 놀라운 구조적 통일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총렬주의로의 진화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은 혁명적이었지만, 오직 '음의 높낮이'에만 엄격한 규칙을 적용했을 뿐 리듬이나 셈여림은 작곡가의 자유에 맡겨두었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직후의 젊은 작곡가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비이성적인 '감정'이 파시즘과 끔찍한 전쟁을 초래했다고 믿었기에, 음악에서도 인간의 감정과 주관을 철저히 배제한 가장 객관적이고 순수한 구조물을 원했습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음악의 모든 요소를 수학적으로 통제하는 '총렬주의' 또는 '전면적 음렬주의'입니다. 프랑스의 거장 올리비에 메시앙이 <음가와 강세의 모드>라는 곡을 통해 그 씨앗을 뿌렸고, 그의 제자인 피에르 불레즈와 독일의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같은 전위적인 젊은 작곡가들이 이를 극한으로 밀어붙여 완성했습니다.

 

총렬주의에서는 음의 높낮이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모든 음악적 매개변수들이 1부터 12까지의 숫자로 치환되어 음렬로 변화됩니다.

  • 리듬과 음가 (Duration): 32분 음표를 '1', 16분 음표를 '2', 점 16분 음표를 '3'으로 설정하는 식으로 음의 길이를 12단계로 수치화하여 배열합니다.
  • 강세 및 셈여림 (Dynamics): 피아니시시시모부터 포르티 시시 시모까지 소리의 크기를 12단계로 쪼개어 규칙에 따라 배치합니다.
  • 아티큘레이션과 음색 (Articulation & Timbre): 스타카토(짧게 끊어뜨리기), 레가토(부드럽게 이어서 치기), 악센트 등 악기를 연주하는 방법과 음색마저도 정해진 수열에 따라 기계적으로 할당됩니다.

이러한 방식은 작곡가를 감정을 표현하는 예술가에서, 철저한 수치와 설계도에 따라 소리를 조립하는 '수학자'나 '건축 엔지니어'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악보는 인간이 도저히 연주하기 힘들 정도로 기하급수적으로 복잡해졌고, 역설적이게도 가장 완벽하게 통제된 이 음악은 청취자의 귀에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완벽한 카오스나 우연적인 소음처럼 들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연주 불가능성과 복잡성은 훗날 컴퓨터와 기계를 이용한 '전자 음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지금까지 현대 음악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인 '음렬주의'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소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는 현대 음악이지만, 작곡가가 숨겨놓은 이러한 수학적이고 철학적인 퍼즐을 이해하고 듣는다면 완전히 새로운 예술적 쾌감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널드 쇤베르크의 <피아노 모음곡 Op.25>나 피에르 불레즈의 <구조 I>과 같은 작품을 직접 감상해 보시며 음렬주의의 매력을 경험해 보시기를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