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스턴 처칠의 생애
윈스턴 처칠은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의 후손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 가문은 유명한 정치인을 낳았는데, 처칠이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아일랜드 총독을 지냈고 그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비서로 일했습니다. 처칠의 일곱 번째 조상인 선덜랜드의 세 번째 백작 찰스 스펜서도 웨일스 관리 다이애나의 여덟 번째 조상이었습니다. 웨일스 관리 다이애나와 처칠은 같은 뿌리를 가진 친척이었습니다. 윈스턴 처칠의 아버지 랜돌프 헨리 스펜서-처칠 경은 재무부 장관을 역임할 정도로 유명한 정치인이었고, 어머니 제니 제롬은 미국 여성이었습니다. 그러나 타협하지 않던 그의 아버지는 수년간의 참회 끝에 정적과 권력 투쟁에 밀리고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처칠은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서 사관생도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처칠은 또한 아버지의 정치적 실패를 교훈 삼아 정치적 반대자들에게 타협, 유머, 재치를 보여주었습니다.
사관학교 시절
라틴어 성적이 좋지 않아 2시간 동안 라틴어를 전혀 쓸 수 없었고, 이는 해로우 스쿨 입학시험에서 주어진 시간과 해로우 스쿨에서 공부하는 데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독서를 좋아해서 문학과 역사에 능했기 때문에 영문학과 역사 점수가 좋아서 합격했습니다. 부상을 당해 1년 동안 라틴어를 공부할 필요가 없었던 브라이튼 스쿨로 전학했습니다. 아들이 군인이 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아버지의 권유로 학과 공부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세 차례에 걸쳐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육군사관학교에 다닐 때는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읽기, 수영, 승마를 배웠고, 중대장이 모범을 보이는 모습을 보며 리더십과 공동체 규칙 존중을 배웠습니다.
졸업 후 보어 전쟁에서 소위로 임관한 그는 인도 기병 장교임에도 불구하고 장교로 군 복무를 하던 중 배에서 내려 어깨를 다쳐 흔들리는 재해를 당해 기병 검인 검을 휘두르지 못해 자비로 마우저 C96 권총을 구입해 사용했습니다. 포로로 잡혀 수용소에서 복무하던 처칠은 영국인의 도움으로 로마 가톨릭 사제로 변장하고 숨어 지낼 수 있었습니다. 처칠은 수단과 인도 말랑칸트 주민들의 영국 식민 통치 저항 진압에도 참여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처칠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 장관으로 재직했습니다. 처칠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석탄에서 석유로 연료를 전환하여 군함의 속도를 빠르게 개선하는 등 국방 개혁에 열정을 쏟았지만 독일이 잠수함을 개발했기 때문에 개혁은 실패했습니다. 갈리폴리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영국군을 파견한 작전도 많은 사상자와 재산 피해로 인해 실패했습니다.
처칠은 처제의 수술 실패 권유로 장관직에서 물러났지만 우울증을 잊기 위해 시골에서 수채화를 그렸습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중령으로 전쟁에 복귀해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당시 그는 유머를 활용해 군인들의 사기를 높이고 복지를 개선하여 모든 군인이 목욕을 통해 만연한 피부 질환을 치료하고 정신적 고통과 스트레스를 진정시킬 수 있도록 했습니다. "겁먹지 마세요. 전쟁은 미소를 지으며 싸웁니다." 그는 어린아이의 마지막 도움이었던 알렉산더 플레밍도 도왔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보수당 의원으로 활동한 후 보수당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유당으로 당을 바꾼 후 다시 보수당에 입당했습니다. 처칠은 당시 보수당 정치인들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혔습니다. 그 후 그는 정계에서 추방당했지만 정계로 복귀했습니다. 처칠은 나치 독일이 영국을 공격할까 봐 공군력 강화를 제안한 적이 있는데, 당시 정치권은 이를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나치 독일 공군이 실수로 폭탄을 떨어뜨린 것이 실제 영국인을 공격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람들은 처칠의 견해가 옳다고 판단했고, 영국 정부는 처칠을 다시 해군 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이후 네빌 체임벌린은 외교 문제를 책임지고 사임했고 1940년 5월 조지 6세의 승인을 받아 처칠이 총리로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처칠은 영국 본토의 공중전을 막고 연합군의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처칠 시대에 지어진 벙커는 여전히 영국에서 지하에 있습니다.
종전과 말년
1945년 1월 1일부터 1945년 7월 26일까지 6개월 동안 영국 군주 조지 6세를 승리로 이끈 처칠은 1943년 11월부터 1945년 7월까지 카이로 선언, 테헤란 회담, 얄타 회담, 포츠담 선언 등 전후 유럽 문제에 대해 연합군 간 여러 차례 회담을 가졌습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의 장본인 아돌프 히틀러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전략이었습니다. 이는 소련의 일부가 동유럽 국가들을 합병하고 통제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처칠은 소련 지도자 스탈린을 증오 체제를 이끄는 '악마' 폭군으로 보았습니다. 1943년 11월 22일 카이로에서 그는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중국의 장개석을 만났습니다. 카이로 회담 직후 루스벨트와 처칠은 소련의 스탈린을 만나기 위해 테헤란으로 이동했습니다. 처칠은 테헤란 회담에서 영국이 폴란드의 독립 국가 복원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영국은 폴란드 문제가 연합국 간에 마찰을 일으킬까 우려하여 폴란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우려했습니다.
1945년 7월, 보수당은 총선에서 패배한 후 총리직에서 물러났습니다. 노동당은 393석, 유효 투표 총수의 48%를 차지하며 승리했고,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은 213석으로 줄었습니다. 이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큰 패배였습니다. 1946년 3월 5일 미국 미주리주 남부의 작은 도시 풀턴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연설에서 처칠은 유럽에 '철의 장막'이 걸려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처칠은 소련의 팽창주의에 대응하기 위해 '영어권 국민들의 형제단결'을 호소했습니다. 1951년 보수당은 정권을 되찾고 총리로 재임명되었습니다.
1953년 그는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1955년 앤서니 이든에게 이 상을 물려주고 하원에 머물렀으며, 1964년에는 국회의원직에서 물러나고 공식적으로 정계에서 은퇴했습니다. 1964년 미국 의회는 처칠에게 명예 미국 시민권을 수여했습니다. 1965년 1월 24일, 그는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영국의 모든 관공서와 학교, 대사관, 영사관 등이 국기를 게양했습니다. 영국 국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도 애도를 표했고 장례식은 국장급으로 치러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