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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브러험 링컨, 정치활동, 노예제도

by story7202 2025.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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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브러험 링컨
에이브러험 링컨

에이브러험 링컨

에이브러햄 링컨은 미국의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16대 대통령으로 남북전쟁이라는 큰 내부 위기 속에서 미국을 이끌며 연방을 보존하고 노예제를 폐지했습니다. 그는 당시 미국 북서부의 개방된 지역에 거주하는 가난한 가정 출신으로, 학교에서 배우기보다는 독학으로 공부하고 학업을 마쳤습니다. 이후 그는 변호사 시험에도 혼자 합격하여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일리노이주 의원이 되어 상원 선거에서 두 번이나 낙선했습니다.

 

링컨은 노예제 확대에 공개적으로 반대했으며, 선거 기간 동안 토론과 연설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 결과 그는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확보했습니다. 대통령이 된 후 임기 중 벌어진 남북전쟁에서 북부 주들을 이끌며 연방에서 분리하려는 남부연합을 승리했습니다. 1863년에는 해방 선언을 발표하여 미국 헌법 제13조의 통과를 주장하고 노예제 폐지를 이끌어냈습니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내전에서 승리하는 데 주력했고, 남부 11개 주 분리 선언 이후에도 남부 11개 주 분리 독립을 선언한 후 이들과 통합할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연방주의자였던 그는 전례 없는 군사 행동을 취하며 재판 없이 분리주의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감금하거나 구금했습니다. 링컨은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과 같은 최고 사령관 선출에 깊이 관여하여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역사가들은 그가 공화당의 여러 파벌을 조정하여 내각에 당 지도자들을 참여시켜 협력했다고 믿습니다. 링컨은 1861년 말 쩐 사건을 영국과의 전쟁 직전까지 몰고 간 위기를 해결했습니다. 링컨의 지도 아래 북부군은 북부와 남부의 경계였던 주들을 점령했습니다. 링컨은 1864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다시 승리했습니다. 공화당의 중심 지도자로서 링컨은 매 순간 비판을 받았습니다. 노예제에 반대하는 공화당 급진파는 남부에서 더 강력한 행동을 촉구했고, 전쟁에 반대하는 민주당은 평화와 협상을 촉구했습니다.

 

무소속 의원들은 링컨을 적으로 여겼고, 수사와 연설을 훌륭하게 활용하여 대중의 의견을 이끌었습니다. 게티즈버그 연설은 자유주의, 평등, 민주주의라는 미국 전통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자주 인용되는 연설로 꼽힙니다. 전쟁이 끝나자 링컨은 전후 재건에 대해 신중한 시각을 가지고 관대한 화해를 통한 국민 통합 정책을 주장했습니다. 남부연합이 패배한 지 6일 후, 링컨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재임 중 암살당했습니다. 전문가들은 링컨을 모든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일관되게 평가하며, 진정한 영웅이자 성인, 순교자는 키가 무려 193cm에 달합니다. 그는 취임 13주 차 외에 태어난 최초의 미국 대통령입니다. 그의 초상화는 현재 미국에서 5달러 지폐에 나와 있습니다.

링컨의 정치활동

링컨은 1832년 일리노이주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하여 처음으로 정치 경험을 쌓았습니다. 1833년에는 관심 있는 법학을 공부하고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1834년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1846년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1858년에는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경험이 많은 정치인 더글라스와 경쟁했습니다. 당시 그들의 논쟁의 주제는 노예제였으며 링컨은 분열된 의회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연설을 통해 노예제에 맞서고 있던 미국인들의 단결을 호소했습니다. 링컨은 패배하고 더글라스는 상원의원에 재선 되었지만 더글라스와 논쟁을 벌이면서 노예제를 "악마의 시스템"이라고 비판하여 노예제에 대한 반대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860년 5월 18일에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그는 윌리엄 H. 슈어 상원의원을 제치고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습니다. 1860년 11월 6일, 그는 제16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러자 남부에서는 '노예제 반대파'들이 대통령 선거에 대한 위기감을 공개적으로 표명했습니다. 같은 해 12월 20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는 처음으로 연방 탈퇴를 선언했고, 이듬해 1월과 2월에 6개 주가 연방에서 탈퇴했습니다. 1861년 2월 연방에서 탈퇴한 남부 7개 주 대표들은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 모여 연방을 결성했습니다. 1862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한 링컨은 남부와 협상을 계속했지만 진전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남북전쟁은 1861년 4월 12일 섬터 포크 전투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862년 9월 19일, 엔티넘 전투에서 북부군이 승리한 지 3일 후, 링컨은 미국에서 노예 해방 예비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1863년 1월 1일 해방 선언이 발표되었고, 북부의 통제를 벗어난 남부 지역을 놓고 전쟁 중이던 1864년 선거에서 민주연합당이 창당되어 재선 되었습니다. 부통령은 민주당원인 앤드류 존슨이었습니다. 4년간의 전쟁은 1865년 4월 남부의 수도 리치먼드가 함락되면서 사실상 끝났습니다.

노예제도

노예제도는 일부 기독교인들은 링컨이 노예제를 불문율로 반대했다고 믿지만, 다른 기독교인들은 링컨의 주요 관심사가 노예제 자체의 폐지나 노예제 폐지가 아니라 노예제의 존재를 두고 남북이 대립하는 것을 막아 미국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학자들마다 몇 가지 의견 차이가 있습니다. 어쨌든 링컨이 노예제를 '악의 시스템'이라고 부를 만큼 악습으로 정의한 것은 사실이며, 미국 정부는 남북전쟁 당시 링컨이 대통령이 되고 노예 해방 선언과 미국 헌법 제13조가 통과되면서 노예제에서 나온 흑인들에게 자유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13차 수정헌법이 통과된 직후 링컨은 암살당했습니다.

경제학자 토마스 델로렌조는 저서 '링컨의 진실 - 헤게모니즘, 위대한 해방자의 정치적 초상'에서 링컨의 연설문과 군 지휘관들에게 보낸 편지 등 주요 문서를 인용해 링컨을 흑인 노예를 옹호한 적이 없기 때문에 노예 해방 선언은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이며, 남북전쟁 당시 조직적 파괴, 그를 비판하는 언론 탄압, 인권 영장 정지 등을 통해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침해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또한 미국 중앙정부의 확장과 로비, 정치-경제 협력도 비판했습니다.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신격화되지 않은 현실 정치가 링컨에게 다른 각도에서 빛을 비추면 해방 선언과 같은 링컨의 행동이 좋지만, 다른 측면과 시대상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반면 남부 노예 흑인들은 자유인이 되었지만 그들의 삶은 모두 파란만장 하였습니다. 생계 문제가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다시 한번 옛 상전 아래서 농장 노동자들에게 종속되었고, 노예제 폐지 이후에도 미국에서는 흑인에 대한 차별이 계속되었고 백인 우월주의를 주장하는 KKK와 같은 테러 단체가 등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화당 급진파가 정치 상황을 책임지자 흑인들이 남부 의회에 들어와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지만 해산되면서 남부의 흑인 인권이 폐지되고 19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실질적인 차별이 지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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