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7년, 뉴욕 필하모닉의 창립 1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오자와 세이지의 지휘로 초연된 곡. 다케미츠 도루의 <노벰버 스텝스(November Steps)>는 서양 클래식 음악의 심장부에서 일본의 전통 악기를 전면에 내세운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우리는 '융합'과 '크로스오버'라는 단어에 지나치게 익숙해진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라는 타이틀을 단 음악이나 예술 작품들을 접할 때면, 우리는 은연중에 그 둘이 모난 곳 없이 매끄럽게 섞여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내기를 기대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제가 느낀 것은 아름다운 조화가 아니라 낯설고도 서늘한 '충돌'이었습니다.
서양의 거대한 교향악단과 일본의 전통 악기인 비파, 샤쿠하치의 만남. 뻔한 백과사전이나 음악사 책에서는 이를 두고 '동서양 음악의 훌륭한 접목'이라고 평가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곡을 고요한 방에서 눈을 감고 끝까지 들어본 사람이라면, 그 평가가 얼마나 납작하고 게으른 것인지 금세 깨닫게 됩니다. 다케미츠 도루는 두 세계를 억지로 화해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 음악을 통해 두 세계가 얼마나 다른지, 그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을 극명하게 전시합니다. 저는 바로 이 지점에 <노벰버 스텝스>가 가진 진짜 철학과 독창성이 숨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소리의 질감이 만들어내는 날 선 대치
음악이 시작되면 두 대의 하프와 타악기를 포함한 거대한 서양 관현악이 안개처럼 무대를 덮습니다. 서양 음악 특유의 논리적인 화성과 치밀하게 구축된 구조가 돋보이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그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음향을 날카롭게 찢고 들어오는 비파와 샤쿠하치의 소리는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비파의 현을 튕기는 소리는 멜로디라기보다는 차라리 '타격음'이나 '파열음'에 가깝습니다. 서양의 현악기들이 어떻게든 소리의 입자를 곱게 다듬어 티끌 없는 '순음(pure tone)'을 내려고 애쓰는 반면, 비파의 둔탁한 튕김과 샤쿠하치의 거친 숨소리는 악기 내부의 마찰음과 연주자의 날숨이라는 '잡음(noise)'마저 음악의 일부로 포용합니다. 저는 이 극단적인 대조를 들으며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습니다. 현대 사회는 늘 우리에게 주변과 튀지 않게 섞이라고, 모난 음색을 버리고 전체의 화음에 맞춰 노래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노벰버 스텝스> 속의 전통 악기들은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물결 속에서도 결코 자신들의 거친 질감을 깎아내거나 숨기지 않습니다. 서양 음악의 거대한 파도 앞에서 일본의 두 악기는 마치 고립된 채 깎아지른 듯 서 있는 날카로운 절벽처럼 느껴집니다. 다케미츠 도루는 억지로 섞여 탁해지는 것보다, 각자의 고유한 본질을 유지한 채 날카롭게 대치하는 것이 훨씬 더 진실한 만남이라는 것을 소리로 증명해 보입니다.
소리보다 무거운 '여백(Ma, 마)'의 존재감
이 곡을 들으며 제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역설적이게도 '소리가 없는 순간들'이었습니다. 곡의 후반부, 정확히 10번째 단에 이르면 오케스트라가 완전히 침묵하고 비파와 샤쿠하치만의 긴 카덴차가 이어집니다. 유튜브에서 이 곡의 오자와 세이지 지휘 영상을 찾아보신다면, 대략 14분에서 15분대를 넘어가며 시작되는 이 숨 막히는 침묵의 카덴차 구간을 꼭 눈을 감고 들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이 구간에서 두 악기는 서로 대화한다기보다는 각자의 파편화된 독백을 툭툭 내뱉습니다. 그리고 그 독백들 사이에는 길고 무거운 침묵, 즉 '여백(일본어로는 '마(間)')'이 존재합니다. 서양 음악에서 쉼표는 다음 음표로 가기 위한 물리적인 대기 시간이거나 음악적 구조를 나누는 기호로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노벰버 스텝스>에서의 침묵은 단순히 비어있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팽팽한 긴장감을 가진, 형태가 없는 하나의 '소리'로 다가왔습니다.
비파가 한번 거칠게 현을 뜯고 난 뒤 찾아오는 기나긴 적막 속에서, 저는 허공으로 사라져 가는 소리의 잔향과 다음 소리가 터져 나오기 직전의 응축된 에너지를 온몸으로 감각할 수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시각적, 청각적 자극으로 채워져야만 안심하는 현대인들에게 이처럼 길고 묵직한 침묵은 견디기 힘든 고통일지도 모릅니다. 무엇이든 꽉 채워져 있어야 완성되었다고 믿는 강박. 저는 이 곡의 여백을 들으며, 텅 빈 공간을 두려워하여 의미 없는 소음과 정보들로 일상을 채워버리는 저 자신의 모습을 깊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다케미츠가 음악 속에 던져 놓은 여백은, 단순히 악보 상의 쉼표가 아니라 듣는 이의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철학적인 거울이었습니다.
타협하지 않는 것들의 위대한 공존
<노벰버 스텝스>는 퇴근길에 가볍게 들을 수 있는 편안한 음악이 결코 아닙니다. 듣는 내내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귀를 기울여야 하며, 때로는 그 낯선 불협화음과 끝을 알 수 없는 긴 침묵에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 불편함의 끝에는 다른 어떤 음악에서도 느끼기 힘든 묘한 해방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와 다른 타인, 혹은 이질적인 문화를 만났을 때 어떻게든 공통점을 찾아 억지로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 묶으려 애씁니다. 다름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다케미츠 도루는 소리의 충돌을 통해 묻습니다. "굳이 하나로 매끄럽게 섞여야만 하는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이질적인 목소리를 내면서도 우리는 같은 무대 안에 충분히 공존할 수 있지 않은가?"
작품 속에서 비파는 서양 하프 흉내를 내며 타협하지 않았고, 샤쿠하치는 플루트처럼 부드러워지려 애쓰지 않았습니다. 오케스트라 역시 억지로 동양적인 5 음계 선율을 흉내 내며 그들을 어설프게 감싸 안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평행선을 달렸지만, 그 좁혀지지 않는 평행선이 만들어낸 팽팽한 긴장감과 에너지는 그 어떤 완벽한 화음보다 강렬하고 묵직한 울림을 만들어냈습니다.
이질감을 감추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이질감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미학으로 승화시킨 작품. <노벰버 스텝스>는 단순한 현대 음악의 한 페이지를 넘어, 다름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돌직구를 던지는 철학적 선언문과도 같습니다. 일상 속에서 무언가와 억지로 타협하느라 자신의 고유한 색깔을 잃어버렸다고 느껴지는 날, 이 곡이 만들어내는 서늘한 마찰음과 침묵의 무게에 온전히 귀를 맡겨보시기를 바랍니다. 영상 15분경부터 시작되는 그 낯선 소리의 덩어리들이, 타인과 다름을 두려워하지 않고 온전히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작은 용기를 불어넣어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