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는 그야말로 소음의 늪입니다. 우리는 출퇴근길의 백색소음을 지우기 위해, 혹은 우울한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이어폰을 꽂고 끊임없이 소리를 쏟아붓습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음악을 일상의 빈 공간을 채우고 불안을 덮어두는 용도로 사용해 왔습니다. 하지만 타타르계 러시아의 현대 음악가 소피아 구바이둘리나(Sofia Gubaidulina)의 음악을 처음 마주했을 때, 제가 경험한 것은 소리의 채워짐이 아니라 '비워짐'이었습니다.

과거 옛 소련 체제의 엄격한 검열과 억압 속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자신만의 깊은 종교적, 영적 세계를 구축했던 그녀의 음악은,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소음에 중독되어 있는지, 그리고 완벽한 침묵 앞에서 얼마나 큰 공포를 느끼는지를 아주 날카롭게 폭로합니다.
소리가 멈춘 자리에 남는 것, 침묵의 무게
구바이둘리나의 대표곡인 <오페르토리움>이나 바얀과 첼로를 위한 <십자가 위에서>를 듣다 보면 유독 당혹스러운 순간이 찾아옵니다. 한창 고조되던 소리가 예고 없이 뚝 끊기고, 그 자리에 비정상적으로 긴 '공백'이 들어서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고전 음악이나 대중음악에서 쉼표가 다음 선율로 넘어가기 위한 가벼운 숨 고르기라면, 그녀의 음악에서 침묵은 마치 숨을 참으라고 강요당하는 듯한 묵직한 압박감으로 다가옵니다.
늦은 밤 방의 불을 끄고 그녀의 곡을 처음 들었을 때의 감각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갑자기 소리가 멈추자 스트리밍 앱이 끊긴 줄 알고 스마트폰 화면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려보기도 했죠. 그 적막은 익숙한 방 안의 공기마저 낯설게 만들 정도로 불편했습니다. 하지만 도망치듯 이어폰을 빼려는 찰나, 그 기분 나쁜 고요 속에서 묘한 경험을 했습니다. 귀를 때리던 악기 소리가 사라진 그 텅 빈 시간에, 오히려 제 속에서 들끓고 있던 시끄러운 소음들이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한 겁니다.
낮에 직장 동료에게 삼키지 못하고 뱉어버린 날 선 말들, 다가올 미래에 대한 세속적인 불안감, 그리고 묘한 자괴감 같은 것들이 그녀가 깔아놓은 침묵의 융단 위로 적나라하게 쏟아졌습니다. 구바이둘리나는 악기의 소리로 귀를 즐겁게 해주는 대신, 길고 지독한 침묵을 던져 제 민낯을 강제로 마주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건 단순한 음악 감상이라기보다 제 영혼의 밑바닥을 들여다봐야만 하는, 서늘하고도 고통스러운 고해성사의 시간이었습니다.
불협화음, 인간의 고통을 긍정하는 날 것의 영성
구바이둘리나의 음악을 논할 때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단어는 결코 빠지지 않습니다. 독실한 러시아 정교회 신자인 그녀에게 음악은 신과 교감하는 통로였습니다. 하지만 흔히 '영적인 음악'이라고 할 때 떠올리는 평화롭고 성스러운 화음, 예를 들어 그레고리오 성가나 잔잔한 뉴에이지 음악을 기대한다면 큰 코를 다치게 됩니다.
그녀의 영성은 몹시 거칠고, 폭력적이며, 신경을 긁는 듯한 날카로운 불협화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현악기의 줄을 끊어질 듯 긁어대고, 타악기는 심장 박동을 무너뜨리듯 불규칙하게 요동칩니다. 저는 바로 이 지점이 구바이둘리나가 가진 독창성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영성은 고통을 외면하고 얻어지는 온실 속의 평안이 아니라, 인간이 겪는 찢어질 듯한 번뇌와 실존의 늪을 정면으로 통과해야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소리로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불협화음을 듣고 있으면,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발버둥 치는 우리네 삶의 모습이 겹쳐 보입니다. 화음이 맞지 않아 귀를 찌르는 그 소리들은, 불완전하고 상처투성이인 인간의 실존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그 극심한 소음의 투쟁 끝에 마침내 찾아오는 단 한 줄기의 맑은 선율이나 깊은 침묵은, 그 어떤 화려한 화성학적 해결보다 깊은 카타르시스를 줍니다. 그것은 진흙탕 속에서 마침내 피어나는 연꽃을 목격하는 것과 같은 경외감을 선사합니다.
숨 쉬는 악기, 바얀이 들려주는 영혼의 호흡
제가 구바이둘리나의 음악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또 다른 부분은 러시아의 민속 악기인 '바얀(Bayan)'의 사용입니다. 바얀은 우리가 흔히 아는 피아노 건반 형태의 아코디언과 달리, 양손 모두 수백 개의 촘촘한 버튼으로 이루어져 있어 훨씬 더 넓은 음역대와 복잡한 화음을 낼 수 있는 악기입니다. 특유의 깊고 서늘한 금속성 리드 소리 때문에 때로는 파이프 오르간처럼 웅장하게 들리기도 하죠. 하지만 클래식 무대에서는 오랫동안 서민들의 춤곡을 연주하는 변방의 길거리 악기 취급을 받았습니다. 구바이둘리나는 이 소외된 악기를 영혼의 메신저로 당당히 승격시켰습니다.
바얀은 연주자의 품에 안겨 주름상자가 팽창하고 수축하는 직접적인 물리적 힘으로 소리를 냅니다. 구바이둘리나는 단순히 바얀의 웅장한 선율을 빌려오는 데 그치지 않고, 악기 자체의 물성을 음악의 일부로 끌어안았습니다. 연주자가 수많은 버튼을 누를 때 나는 '달그락'거리는 기계적인 마찰음, 그리고 숨결처럼 바람이 빠져나가는 거친 소음마저 예술의 영역으로 가져온 것입니다.
그녀의 독주곡 <데 프로푼디스(De Profundis, 깊은 곳에서)> 같은 곡에서 바얀의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치 거대한 폐가 눈앞에서 직접 숨을 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때로는 쫓기는 짐승처럼 가쁘게 몰아쉬고, 때로는 임종을 앞둔 사람처럼 길고 처절한 숨을 내뱉습니다. 기계적이고 매끄러운 전자음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토록 원초적이고 육체적인 '호흡'의 소리와 악기의 뼈대가 부딪히는 소리를 듣는 것은 대단한 충격이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너무 많은 정보와 콘텐츠를 삼키느라 정작 우리 자신의 숨소리조차 잊고 살아갑니다. 구바이둘리나가 연주하는 바얀의 헐떡이는 숨소리는, 질식할 것 같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영혼이 내지르는 비명처럼 들렸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아직 우리가 살아있으니, 멈추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라"는 투박하지만 진실한 위로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처음 구바이둘리나를 접하는 분들을 위한 감상 가이드
현대 음악이 낯선 분들이 그녀의 음악에 다가가기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의 경험을 바탕으로, 구바이둘리나의 세계에 입문하기 위한 작은 팁을 공유합니다.
- 외부의 소음을 완벽히 차단하십시오: 이동 중이나 일하면서 듣는 배경음악으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사용하거나, 조용한 밤 방의 불을 끄고 오롯이 소리(그리고 침묵)에만 집중해 보시길 권합니다.
- <오페르토리움(Offertorium)>으로 시작해 보세요: 그녀의 대표작인 이 바이올린 협주곡은 바흐의 '음악의 헌정' 테마를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해체되는 선율 속에서 그녀가 의도한 침묵을 가장 명확히 느낄 수 있는 곡입니다.
- 불편함을 견디는 인내심을 가져보세요: 귀를 찌르는 불협화음이나 당혹스러운 침묵이 찾아와도 곡을 끄지 말고 그 불편한 감정 자체를 관찰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 끝에 반드시 카타르시스가 찾아옵니다.
구바이둘리나의 음악은 결코 친절하지 않습니다. 퇴근 후 지친 몸을 뉘이고 가볍게 들을 수 있는 말랑말랑한 위로의 음악도 아닙니다. 오히려 잘 덮어두었던 내면의 상처를 들쑤시고, 잊고 싶었던 실존의 고독을 직면하게 만드는 아주 껄끄러운 음악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녀의 음악을 들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모든 취향이 알고리즘에 의해 예측되고, 15초짜리 숏폼 영상이 끊임없이 우리의 시각과 청각을 마취시키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찰나의 '가짜 위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정직하게 비춰볼 수 있는 거친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단 10분이라도 모든 화면을 끄고 소피아 구바이둘리나의 음악이 만들어내는 그 거대한 침묵 속에 머물러 보시기를 권합니다. 처음에는 그 적막과 불협화음이 두렵고 어색하겠지만, 그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은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깊은 내면의 평화일 것입니다. 그녀의 음악은 소음을 이기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더 큰 소리가 아니라, 가장 치열하게 견뎌낸 '침묵'이라는 것을 제게 가르쳐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