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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의 인생, 인권운동, 반전운동

by story7202 2025.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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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 목사
마틴 루터 킹 목사

마틴 루터 킹의 인생

마틴 루터 킹은 1929년 1월 15일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침례교 목사였던 마이클 루터 킹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마틴 루터 킹은 태어났을 때 아버지 마이클 목사와 같은 이름이었지만, 1935년 아버지가 마틴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마틴이 그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제임스 킹도 침례교 목사였습니다.

그의 아버지의 조상은 아일랜드와 아프리카 혈통의 흑인이었습니다. 그의 증조부 네이선 브랜 넘은 침례교 목사가 되었고, 그의 성은 킹이 되었습니다. 그의 증조부 네이선 번햄은 그의 성을 킹으로 삼았습니다. 한편, 그는 부분적으로 백인 혈통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어머니의 할아버지 윌리엄 넬슨 윌리엄스(1804–1863)와 어머니의 증조부 윌리엄스와 레이철 넬슨은 노스캐롤라이나의 백인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마이클 루터 킹 주니어는 성공회 목사입니다. 증조부 때부터 침례교 목사로 활동하며 3대째 침례교 목사였지만 어린 시절부터 백인 우월주의자와 인종차별적 백인에게 경멸과 폭행을 당했고, 경찰의 인종차별에 당당하고 논리적으로 항의하던 아버지는 어린 시절 잘못을 발견하면 복종하거나 침묵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코리아피젯에서 출간한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전기에 따르면 경찰은 그에게 "야, 얘야, 운전면허증 좀 보여줘"라고 말했고, 그는 "여기 면허증 있어. 여기 네 면허증이야"라고 대답했고, 그 말을 듣고 경찰은 그의 무례함을 부끄러워하며 물러났습니다.

소년 시절 그는 침례교회에 다니면서 기독교 교리에 회의적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3살 때 침례교회 주일학교에서 그는 "의심을 버리고 끈질기게 나아가기 시작했다"라고 합니다. 이후 그는 성경에 깊은 진리가 담겨 있고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여 신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심했습니다. 9학년과 12학년을 건너뛰고 15세에 모어하우스 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한 그는 모어하우스 대학교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주 체스터에 있는 크로저 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넉넉한 가정환경 속에서 여유로운 삶을 살았지만 흑인 학생들에 대한 차별과 멸시를 받기도 했습니다. 신학교를 마친 후 매사추세츠로 돌아와 보스턴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그는 주일학교에서 교육을 받지 못한 교사들에게 배운 근본주의적 기독교 신앙에서 기독교 사회 참여를 강조하는 진보적 신앙으로 성격을 바꿨습니다. 또한 빈민가의 흑인과 문맹인에게 문학을 가르치기 위해 주일학교에 다녔습니다. 이후 보스턴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인권운동

1954년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 있는 덱스터 애비뉴 침례교회 목사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당시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침례교회에서 목사로 서품 받았지만 모어하우스 대학교를 졸업하지 않아 공부를 병행하고 있었습니다. 1955년 백인들은 "흑인은 몽고메리 시에서 운영하는 버스에 탈 수 없다"는 규칙을 만들려고 했지만, 그는 이에 반대했습니다. 그러던 중 1955년 12월, 로사 파크스라는 흑인 여성이 몽고메리에서 버스에 타고 있던 백인 남성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 경찰서에 체포되어 체포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흑인 지도자들은 몽고메리의 시내버스 회사에 대한 보이콧을 조직했습니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을 주도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킹은 다른 흑인 지도자들과 함께 이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수천 명의 흑인과 백인이 버스 이용을 거부했고 시민들은 카풀을 조직하고 도보로 이동했습니다. 보이콧이 계속되면서 시내버스 회사들은 상당한 재정적 손실을 입었습니다. 

킹 목사는 참가자들에게 흑인 해방 운동이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시위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시위대와 그 지지자들은 불평등한 체제를 바꾸고 싶지 않은 세력의 지속적인 위협과 공격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구금되었습니다. 킹 목사의 사저에도 폭탄이 날아갔습니다. 다행히 그의 아내와 자녀들은 다치지 않았습니다.

 

곧이어 1956년 12월, 미국 대법원은 버스 내 인종 차별법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로써 마침내 381일 만에 몽고메리 시내버스 보이콧 운동의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그 이후로 애틀랜타에서 침례교 목사로 활동하며 미국 전역의 인권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 2세 등 인종차별 반대 운동에 참여한 동료로는 장로교 목사 윌리엄 슬론 코핀과 침례교 목사 랄프 애버내시 등이 있습니다.

앨라배마주의 시내버스 보이콧은 미국의 인종 불평등과 킹 목사의 리더십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 내 흑인 민권 운동은 더욱 강력해졌습니다. 킹 목사는 이 운동을 주도하며 흑인의 권익을 국제적으로 대변하는 진영의 대표주자로 꼽혔습니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투쟁에 대해 그는 1958년 '자유를 향한 위대한 행진'이라는 책에서 보고서를 썼습니다. 1957년에는 미국 남부에서 흑인을 차별하지 않는 목회자 및 평신도 지도자들과 함께 남부 기독교 리더십 회의 조직과 결성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끝까지 비폭력을 고수했습니다. 그러나 말콤 엑스 등은 그의 운동이 너무 타협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일부 흑인 극단주의자들은 온건한 흑인 인권 운동이 백인과 타협을 모색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흑인 무슬림 지도자 X를 지지하는 비폭력 흑인 운동에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반전운동

그는 또한 1963년부터 베트남 전쟁에 군대를 파견하는 것에 반대하는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그는 젊은이들이 무의미한 전쟁에서 희생을 당하고 베트남 국민을 학살한다고 지적했습니다. 1964년 10월 14일, 그는 미국의 인종 차별을 종식시키기 위한 비폭력 저항 운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그 후 그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또한 베트남인의 운명은 베트남인에게 맡겨야 하며 미국의 개입은 불공정하고 무고한 미국 청년들의 피가 낭비되었다고 말하며 전쟁을 비판했습니다. 그 후 그는 베트남 전쟁을 무의미한 전쟁으로 규정하고 반전 운동을 계속했습니다.


킹 목사는 흑인 민권 운동 외에도 베트남 전쟁의 폭력성을 지적하며 반전 운동을 추진했습니다. 또한 1963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1964년 초 예일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고 가톨릭 인종협력위원회에서 존 F. 케네디 상을 수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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