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마거릿 대처, 정치 활동, 총리 시절

by story7202 2025. 3. 4.
반응형

마거릿 대처
마거릿 대처

마거릿 대처

마가렛 힐다 대처는 정치인이자 영국 최초의 여성 보수당 지도자로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영국 총리를 역임했습니다. 그녀는 집권 후 인플레이션 인상, 소득세 인하, 소비세 및 간접세 인상, 은행 금리 인상, 정부 규모 축소, 역량 강화 시스템 도입, 민간 기업 업무 간소화 등 긴축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서머빌 칼리지에서 법학과 화학을 전공했으며, 1959년 보수당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습니다. 이후 1961년부터 1964년까지 연금과 국민보험 분야 정무 차관을, 1970년부터 1974년까지 보수당 히스 내각의 교육부 장관과 과학부 장관을 역임했습니다. 1975년에는 보수당 당수로 선출되어 영국 최초의 여성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1979년 총선에서 노동당의 제임스 캘러핸 전 총리를 꺾고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습니다. 1982년 아르헨티나와의 포틀랜드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이후 1987년 총선에서 지속적인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3선에 당선되어 20세기 영국 최장수 총리로 11년 7개월의 최장수 재임 기간을 기록했습니다. 

 

그녀는 1925년 10월 13일 링컨셔주 그랜섬에서 식료품점의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결혼 전 성은 로버츠였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을 그랜섬에서 보냈고, 아버지는 식료품점 두 곳을 운영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그녀의 가족이 생계를 유지할 수 없을 만큼 극도로 가난하다고 묘사했지만, 생각만큼 가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녀의 아버지인 알프레드 로버츠는 지역 유명 인사이며 시장으로도 재직했습니다. 대처의 출생지는 대대로 독실한 감리교였으며, 그녀는 가훈이었던 '검소함, 자기 책임, 자조노'"은 계승되었습니다. 대처는 아버지인 알프레드를 존경하며 종종 "우리는 아버지로부터 필요한 모든 것을 배웠다"라고 말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교 재학 시절에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경제학에도 몰두했습니다. 당시 경제에 대한 생각은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 개혁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1947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화학 학위를 받고 졸업했습니다. 독학으로 법학을 공부한 그는 29세의 나이에 사법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며 그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철의 여인'이 있습니다.

정치 활동

1959년 보수당 후보로 출마하여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한 그녀는 1970년 당시 총리였던 에드워드 히스에 의해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975년에는 영국 최초의 여성 보수당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1950년 보수당 소속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습니다. 이듬해인 1951년에는 10년 선배인 데니스 대처와 결혼하여 법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1954년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여성의 권리 확대에 대한 강한 호소가 있었습니다. 1959년 하원의원에 처음 당선되었고 1970년 히스 내각에서 교육과학부 장관을 역임했습니다. 교육 관련 예산을 삭감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대처는 학교 내 무상 우유 급식을 폐지하기로 결정하고 밀크 스내처라는 비판을 받는 등 격렬한 시위를 촉발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교육 시설 개보수와 교사 인건비 절감은 줄일 수 없다고 답했습니다.

 

1974년 선거에서 보수당은 패배했고, 이듬해 1975년 2월 보수당 지도부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대처는 원래 당의 우파에서 키스 조셉을 지지했지만, 조셉은 여러 문제 발언으로 인해 당 안팎에서 반대하자 후보직을 포기했습니다. 따라서 대처는 우파에 출마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육과학부 장관의 유일한 경험인 대처의 당 대표 출마에 대해 우려했지만, 그는 에드워드 히스를 꺾고 보수당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같은 해 영국을 포함한 35개국에서 서명하고 채택한 '헬싱키 선언'을 맹렬히 비판했습니다. 한편, 소련 국방부의 '크라스나야'는 1976년 1월 24일 자 기사에서 대처를 '철의 여인'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대처 자신은 '철의 여인'이라는 통칭을 좋아했고, 모든 언론에서 다루어져 대처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총리 시절

1979년부터 11년 동안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를 역임했습니다. 집권 후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긴축 정책이 시행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처 총리는 소득세 인하, 상품에 부과되는 특별소비세를 포함한 소비세 및 간접세 인상, 은행 금리 및 금리 인상, 정부 규모 축소를 추진했습니다. 또한 근무 기간에 따른 연공서열제를 폐지하고 성과주의를 도입했으며, 무능하고 부패가 의심되는 사람에 대한 해임 및 해임 등의 정책을 무조건 시행했습니다. 정부 규모를 줄임으로써 각종 세금 낭비를 줄이고 전산화, 기계 생산 시설 공급 등 민간 기업의 업무를 간소화했습니다. 이로 인해 세금과 각종 비용이 감소하여 영국의 전반적인 경제 성장률이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회복되고 인플레이션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경제 정책은 신자유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또한 인플레이션과 노사 분쟁으로 침체된 영국 경제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옹호했습니다. 이 정책은 현대의 정치-외교적 동지였던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정책인 레이거노믹스와 많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그녀는 철저하게 반공주의를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맹목적인 보수주의가 아닌 사상, 출판, 신념의 자유를 보장했습니다. 그의 정책은 영국과 사회에서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가 혼합되어 있었지만 경제 분야에서는 자유주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소련은 그에게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앨런 무어는 "벤데타를 위한 V"에서 대처주의의 극단적인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비꼬았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대담한 시장주의 경제를 도입하여 영국을 영국의 질병으로부터 구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석탄 및 철강 노동자들의 장기 파업을 억제하고 주요 국영 기업을 민영화하며 사회 복지 목표를 엄격하게 검토하고 복지 혜택을 줄였습니다. 외교적으로는 미국과의 우호 관계를 강화하면서 유럽 공동체 내 경제 공동체 이상의 발전에 반대했고, 1982년 아르헨티나의 침공으로 발발한 포틀랜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녀의 정책은 토니 블레어 총리 시절 영국 경제 호황의 근간으로 꼽히지만, 반대론자들은 그녀가 빈곤, 지역 격차, 영국 제조업의 붕괴를 초래했다고 비판합니다. 또한 경제 개혁을 위한 그녀의 정책은 영국의 경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1982년 파리다카르 집회에서 아들 마크가 실종된 후 구조되었고, 이로 인해 철의 여인으로 불렸던 대처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