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 출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태합 소성기에 따르면 오와리 지방 나카무라에서 농부로 알려진 기노시타 아에몬과 어머니 나카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출생 연도에 대해서는 덴 분 5년이라는 말이 있지만, 최근 덴 분 6년이라는 설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 아에몬의 성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출생일은 음력 1월 1일이며, 이름은 히요시마이지만 기록이 작성되면서 출생은 1537년으로 추정됩니다.
널리 퍼진 이론에 따르면 아버지 기노시타 야몬이 살해된 후 어머니 나카는 치쿠라미와 재혼했지만 양아버지 지쿠아미와의 관계가 가혹하다는 이유로 항상 학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히데요시는 사무라이가 되기로 결심하고 집을 뛰쳐나와 스루가로 향했습니다. 태합소성기에 따르면 그녀는 7살 때 아버지 야몬과 헤어져 8살 때 고메이지로 갔지만 15살에 아버지의 유산을 일부 안고 집을 나간 직후 뛰쳐나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태합기'에서 지쿠마미는 히데요시의 실제 아버지로 간주되며 기노시타 성씨의 성이 아니며 아내 네네의 어머니 성씨라는 의혹을 적고 있습니다.
히데요시의 출신에 대해서는 문학 박사이자 역사학자인 오와다 테츠오가 목수, 대장장이 등 기술자 그룹 출신이라는 설을, 역사학자 이시이 스스무는 행상인 등 비농업 노동자 이론을 채택했습니다. 또한 일본 가문의 다카자와 히토시는 히데요시 가문이 사용하던 세무문과 히데요시의 통칭 도키치로를 비롯해 누나 니슈, 아사히 남편을 기반으로 한 계부 치쿠라미 등 히데요시 자신이 미즈노 가문 출신이라는 설이 지만 현재로서는 대부분의 의혹이 불분명합니다. 그의 출생 배경과 전생, 생년월일 등이 현대 또는 후대에 왜곡, 미화, 장식되는 경우가 많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의 신분이 너무 낮아 나중에 일본을 지배하게 되었을 때 쇼마스터로 취임할 수 없었고, 대신 그를 태합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히데요시는 일본 문화에서 성공하기 전에는 가난한 나라 출신이었기 때문에 심한 경우 평범한 사람들에게 허리를 굽히는 이미지로 등장했고, 역사적인 히데요시의 성과 태도는 더 나은 지위와 삶을 얻을 때마다 점점 더 오만해졌습니다. 노부나가를 죽인 남자와 이 서사를 따라간 한때의 테마르카시온에서도 전통적인 이미지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게 묘사됩니다.
일본통일
일본 통일을 이루며 히데요시는 마지막 적이었던 고호조 가문을 멸문시켰습니다. 히데요시는 오랜 전국 시대를 마감했습니다. 하지만 다테 마사무네처럼 군사력으로 진압되지 않는 다이묘가 많았고 군사력은 온전했습니다. 도요토미 정권의 임무는 이러한 이유로 강력한 다이묘를 대하는 것이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위는 너무 낮아서 정이 장군에 오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치하고 싶어 아시카가 요시아키만이 정이 대장군에서 물러나자마자 정이 대장군직을 폐지하고 정부 관리로서 일본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다이묘의 결혼을 금지하는 새로운 규정은 단 한 가지였지만,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였습니다.
" 관백전하, 왜 정이대장군 직을 폐지하셨나요? " 이 질문이 제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 일입니다. 권력이 약한 다이묘가 그 질문을 하면 무례하게 처벌하면 충분하지만, 다이묘들 사이에서 권력이 커지면 그 질문에 답해야 하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결코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임명되지 못해 천황직을 폐지했다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즉위하지 못해 천황직을 폐지했다고 인정하면 천황직도 폐지할 인간으로 낙인찍혀 일본 국가 전체의 공공의 적이 될 것입니다.
덴쇼 1591년 후계자로 지명된 쓰루마쓰가 세상을 떠나자 조카 히데츠구를 입양해 공식 직함을 넘겼습니다. 히데요시 자신은 당시 태합이라고 불렸습니다. 또한 다도인 세노 리큐의 해임을 명령했습니다. 리큐의 제자인 후루타와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요청이 있었지만 실패했고 리큐의 자리는 이치조모도리 다리가 이어받았습니다. 세노 리큐가 사임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도호쿠호 난부 가문의 일원이었던 크노헤 마사자네는 계승을 위한 투쟁 끝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히데요시는 우지사토, 아사노 나가마사, 이시다 미츠나리로 구성된 군대를 도호쿠로 보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노부 나오의 구원 요청에 따라 총사령관으로 파견되었습니다. 도호쿠의 여러 다이묘들도 이 노력에 동참하여 군대를 6만 명으로 늘렸습니다. 크노헤 마사자네와 사네가 형제는 서로 싸웠지만 항복했습니다. 그 후 크노헤 가문은 모두 참수당하고 파괴되어 반란은 종결되었습니다.
그 결과 일본에서 가장 낮은 지위에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통치자로 즉위했습니다. 이로 인해 현대 일본인들은 정말 밑바닥에서 올라와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을 금태합이라고 불렀습니다.
임진왜란
분로쿠와 게이초의 역이라고도 불리는 임진왜란은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휘 아래 명나라를 정복하고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 일본이 16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반도 남부에 침투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조선군을 격파하고 나라를 멸망시키면서 한성과 평양을 점령하는 등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였지만, 의병과 명군,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각지에서 몰려들면서 상황이 교착 상태에 빠졌고 1593년 분로쿠 2년 차와의 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막부가 일본 최고의 권력을 장악하더라도 막부는 천황의 신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막부가 막부를 세우면 천황의 명령을 수행하기보다는 천황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됩니다. 이는 12세기 겐페이 전쟁에서 승리한 겐지에게 주어진 특권이었습니다. 겐지의 피를 물려받은 사람만이 막부의 지위에 올라 막부를 세울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겐지는 말할 것도 없고 사무라이 가문 출신도 아닌 천민이었기 때문에 쇼군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쇼군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과거 자신의 영토를 회복하고 자신을 방해한 야만인을 물리치고 승리한 군대가 되어 다시 천황으로부터 장군 칭호를 받아 쇼군을 구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막부를 구성하고 쇼군이 되기 위한 명분을 세우는 유일한 방법은 옛 영토라고 주장하는 미마나 에 해당하는 조선의 남쪽을 회복하고 이에 맞서는 명나라 군대를 전멸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영토를 사무라이에게 부여함으로써 하늘이라 항상 불안정했던 신하들 간의 관계를 공고히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를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켰다는 분석이 일반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