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구
김구는 일제 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김봉길보다 나이가 어렸고, 호는 백범과 연상이었습니다. 호는 평민인 범부가 겸손한 백성과 범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인'을 따서 명명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창암이었고, 19세에 창수로 개명했다가 36세에 구로 개명했습니다. 그 외에도 환송 이후 이름인 두래와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 내륙 지역으로 피신하던 시기에 사용된 가명인 장진구 등이 있습니다. 김방경의 25대손으로 본관은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 출신입니다. 17세 때 과거에 응시했지만 낙마한 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고, 불교로 귀의 해 승여의 삶을 살았으나 28세의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기독교에 입문하였습니다. 양산학교와 강화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으며, 해서 교육총회 학무 총감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교육과 계몽 운동 중 일본 제국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해 의권 국회의원, 경찰청장, 내무부 장관, 부총리, 노동국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1920년대 초에는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성에 대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제사회의 호소를 위한 외교적 노력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고, 국내 연결조직인 통신체계의 붕괴로 일제 식민통치의 붕괴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임시정부 내 노선 갈등이 심화되면서 임시정부를 떠났습니다. 김구는 1924년 만주국 통의부 박희광 등을 통해 비밀리에 친일파 암살, 주요 공관 파괴, 군사비 지원 등을 지휘했습니다. 1931년에는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애국단을 조직해 이봉창의 도쿄와 윤봉길 사건을 주도했습니다. 1926년 12월부터 1923년까지는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후 1940년 3월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임시정부 전국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습니다. 1945년 해방 후 임시정부 법통통일운동, 이승만, 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 운동과 미-미합동위원회 반대 운동을 추진했고, 1948년 4월 19일부터 5월 5일까지 평양을 방문해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협상에 참여했습니다.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유일의 독립선거가 치러졌을 때 그는 정치에서 벗어나 건국훈장 등 청소년 교육에 힘을 쏟았습니다. 1949년 6월 26일 안두희 사설 경찰 본부에서 발사한 포탄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장례식은 한국 최초의 공개 장례식으로 치러졌으며, 7월 5일에는 순교자 유해 복원을 추진하여 조성한 용산구 효창동 애국선열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이 수여되었습니다.
임시정부 시절
1940년 3월,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이 사망한 후 김구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해 연기되었던 미국과 유럽의 외교부가 다시 승인되었고, 이승만은 미국 외교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9월에는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 되었고, 그해 9월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에 자금 지원을 요청하여 임시정부 최초의 공식 군대인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충칭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 창설식을 거행했습니다. 한국독립당군은 확대 개편되어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대통령 장개석은 광복군 총사령관을 인정하지 않았고,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 국민당군에 종속되었습니다. 4월 국민당, 대한독립당, 조선혁명당이 통합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집권당으로 대한독립당이 탄생했고, 김구가 대한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1940년 9월, 김 위원장은 중국 정부에 한국광복군 창설 과정을 설명하면서 미국에서 활동할 의사를 밝히고 생활비 이상의 중국 원조를 기대할 수 없어 중국 정부에 여행증명서 발급을 요청했습니다. 중국 정부가 여기서 무언가를 이루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하자 김 위원장은 미국행을 포기하고 실행 계획을 마련해 중국 정부에 제출했습니다. 1940년 9월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유럽-미국 외교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이승만 미 국방부 위원장 등 한국인들과 접촉해 해방 직전 미국 특수사령부와의 합동 훈련을 통해 잠수함을 타고 조선으로 침투할 계획이었습니다. 1941년 10월 해안가에서 열린 동아프리카 반파쇼 대회에서 김구 임시정부 주석이 명예위원장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습니다.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는 국민혁명당 간부와 아나키스트들이 참여했습니다. 1941년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으로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서한이 발송되었습니다. 그해 10월에는 임시정부 승인과 관련된 문제로 중화민국 외교부 장관을 만났습니다. 그해 11월에는 대한민국 건국강령이 제정되어 발표되었고, 그해 12월에는 일본에 선전포고가 발표되었습니다. 1942년 2월에는 김성숙, 김원봉, 장건상이 임시정부에 참여했습니다. 5월에는 김원봉이 군의 수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독립운동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민족주의 독립운동가, 아나키스트로 나뉘어 이념적, 파벌적 대립으로 내부 갈등이 많았습니다. 당시 임정 좌우 갈등은 1943년 한독당 김구 등 국무위원 5명을 암살하고 해임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민혁당 김원봉 등이 대신 내각 입성을 시도했다는 모의 문서도 발견되었습니다. 미국에 머물고 있는 이승만은 김구에게 항의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말 것을 요구했습니다.
광복 이후의 정치 활동
광복 이후 김구는 11월 23일 오후, 그는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임시 숙소는 조선호텔로 정해졌고, 최창학의 별장인 죽첨장을 그에게 기증했습니다. 그 후 최창식이 기증한 죽첨정에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김구는 직접 귀국했지만 "내가 돌아오면 대한민국 정부도 돌아오겠다"라고 선언했습니다
11월 4일, 장제스는 해방을 맞아 귀국하는 김구 선생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을 위한 환송식을 가졌습니다. 이 자리에서 그는 국민당 사무총장 우리 청에게 김구에게 미화 20만 달러를 전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항일 투쟁의 동지였던 김구 선생을 위한 가장 파격적인 마지막 지원이었습니다. 장제스가 김구 선생에게 20만 달러를 지원한 것은 단순한 우정을 넘어 앞으로 일종의 보은의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김 구는 돈을 국내로 반입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당시 김 씨와 김 씨는 임시정부 대표가 아닌 개인 단위로 입국했습니다. 한국 해방과 함께 정부를 장악한 미군정이 다른 권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여운형, 박헌영, 인공내각 구성원들을 견제하기 위해 임시정부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군정은 김 구의 경호원과 한국광복군에게 무기를 휴대할 수 있도록 허용했지만, 장제스 황제가 준 20만 달러는 결국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돌아온 윤치호가 만나자고 연락했지만, 그는 친일파로 비난을 받았습니다. 윤치호의 영향력과 보조금 등 윤치호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김 구는 결국 거절하는 대신 회담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45년 11월 23일, 바쁜 일정 속에서도 김구 선생은 조선일보 복직을 축하하는 기념 휘장을 작성하고 헌정했습니다. 복간호 축하 휘장의 내용은 '유지자 경'으로, '의지만 있으면 결국 이룰 수 있다'는 뜻입니다. 11월 24일에는 국내외 언론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여기서 김구 선생은 '이 선생님보다 더 좋은 수단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1945년 12월, 그는 서울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에 참석했습니다. 임시정부 기념식은 윤보선의 서울운동장 주최로 시작되었습니다. 이어서 오세창의 개회사, 이인의 봉영문 낭독, 권동진의 만세 삼창이 이어졌고, 권동진, 김성수, 이인을 통해 김구에게 봉영문이 전달되었습니다. 오후 2시 20분경 조선생명회사 2층에서 이승만, 이시영, 김규식, 류동률이 창문을 열고 환영 행렬을 맞이했습니다.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 선생은 국민추모대회를 조직하고 조직했습니다. 그는 국민추모대회 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12월 25일, 도남장에서 이승만을 방문하던 중 전담 의사인 유진동 선생과 함께 도남장 산기슭의 판자촌을 찾아 국민을 위로했습니다. 그해 12월 말 신탁통치가 발표되자 그는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조직하고 모스크바 삼자회의의 결정에 반대하는 신탁통치 반대 국민동원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