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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주유천하, 정치활동

by story7202 2025.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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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동상
공자 동상

공자 

공자는 기원전 551년 노나라 취푸에서 떨어진 농촌 지역인 창평향 추업에서 아버지 숙량흘과 어머니 안징재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숙량흘과 본처 시 씨 사이에서 딸 9명을 두었지만 아들은 없었고, 첩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공 피는 선천적으로 다리에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공자는 숙량허가 노년에 안징재와 낳은 아들입니다.

두 사람은 공식적으로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안징재는 동료 전사이자 숙량흘의 친구인 안양의 셋째 딸이었습니다. 숙량흘이 안징재를 만났을 때 숙량흘은 60대 후반이었고 안징재는 16세 소녀였습니다.

공자의 조상은 송나라의 공족으로, 주나라 이전 왕조인 은나라에서 봉토를 하사 받고 공자의 3대보다 먼저 노나라에 온 인물입니다. 이 가문은 송나라 왕실에서 유래한 명문 가문이었지만 몰락하여 노나라에 살았고, 아버지 숙량흘은 무사였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 안징재는 하급 무녀이었다고 합니다.

 

'사기'의 '공서가'에는 공자가 높이 9, 6촌에 이르렀다고 해서 장신이라고 불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 안징재는 곡부로 이주해 홀로 공자를 키웠습니다. 공자는 사생아였기 때문에 공 가문에서 숙량흘의 후손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숙량흘의 재산은 이복 여동생과 이복 조카에게 상속되었고, 그중 어느 것도 그에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마저 실명하여 생활 형편이 악화되었습니다. 그 결과 공자는 어릴 때부터 거칠고 하층민적인 일을 하면서 가난하고 가난한 소년의 시절을 보냈습니다.

기원전 536년에 결혼했고, 기원전 535년 공자 16세의 나이에 어머니마저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죽자 공자는 세 살 상을 마친 후 아버지의 무덤 옆에 그녀를 묻었습니다. 기원전 533년, 기원전 19세의 나이에 송나라의 병관의 딸과 결혼하여 20세에 아들 리를 낳았습니다.  사생아였던 공자에게 인생의 목표는 대부였던 숙량허의 후손, 즉 귀족으로 인정받는 것이었습니다. 공자는 무사였던 아버지와 달리 글과 지식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의식을 모방하는 놀이를 좋아했고, 예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옛 實, 즉 전통 종교의식과 제도, 풍습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공자는 특별한 스승이 없었고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배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주나라의 주모자였던 노자가 그 유명한 인물입니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 배운 내용은 다양한 문헌에 나와 있습니다. 공자는 말년에 "15세에 배우겠다는 결심을 하고 30세에 서 있었다"라고 회상했습니다. 그는 15세 정도에 공부를 시작했고, 30세에 학문의 기초와 삶의 기초를 다지며 인간으로서 우뚝 섰습니다.

30대가 되자 공자는 루에서 가장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사설 학원을 열고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루의 영향력 있는 대부의 자손부터 평민의 자녀까지 '묶인 고기'이상을 가져온 사람은 누구나 배웠습니다. 공자는 <시경>, <서경>, <주영> 등의 경전을 가르쳤습니다.

공자는 노나라에 살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노나라를 건국한 주공을 본받을 인물로 정했습니다. 주공은 젊은 성왕을 대신해 섭정을 맡아 주나라의 봉건제를 확립했습니다. 봉건제는 황제가 형제와 친척을 왕자로, 후손을 다시 대부로 임명하는 종법제를 기반으로 합니다. 그 결과 국가의 주요 기관장들이 씨족이 되므로 이를 종법이라고 합니다.

주유천하

25년, 35세의 나이에 맹손, 숙손, 계손의 반란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소공왕은 신하 계에게 쫓겨나 제나라로 도망쳤습니다. 공자도 기원전 517년에 제나라로 도망쳤습니다. 공자는 제나라 왕, 신하들에게 여러 방면에서 진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음악을 논의하고 경공에게 정명주를 기반으로 한 단순한 정치 이상의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공자의 학식과 고상한 인품에 매료되어 그를 존경하던 경공은 공자의 높은 학식과 덕망에 자신의 입지를 위태롭게 하지 않으려는 안영황제의 적극적인 반대에 좌절했습니다.

 

2년 만에 돌아온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치던 중 46세 무렵 노왕의 측근들의 배신자였던 양호가 세력을 잃고 철수하고 52세가 되자 그는 공직에 올랐습니다. 이듬해 제와 함께 참석한 제나라와의 강화회의에서 제나라가 빼앗긴 노나라 땅을 반환하고 실행할 것을 요구했고, 소정묘를 축출하는 데 참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때 제나라는 노나라를 함정에 빠뜨렸지만 공자가 이를 꿰뚫어 회의장에 들어가 분노를 막고 노나라에 유리하게 강화하려는 수상한 자를 붙잡았습니다. 그는 삼환의 권력을 무너뜨리려 했지만 실패했고, 대부 계인이 제나라의 계략에 기뻐하지 못하도록 만류하면서 그와 대립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크게 낙담한 공자는 자신의 큰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해 벼슬을 버리고 위, 송, 조, 정, 진, 채 등 여러 나라를 다니며 14년 동안 제자들과 온갖 고난을 견뎌냈습니다.

정치활동

공자의 인망은 해가 갈수록 커졌고, 기원전 499년에는 대사구의 관직에 임명되어 대법원장과 외교관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공자는 죽을 뻔한 아이를 구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왕에게 그때까지 이어져 온 순자의 악습을 폐지해 달라고 명령했습니다. 또한 그는 당시 권력자였던 삼환의 폭정을 물리치고, 뛰어난 지략과 용기로 노나라가 전쟁 한 번 없이 잃은 옛 땅을 되찾기 위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계손사의 저항으로 인해 이러한 일들은 도중에 중단되었습니다. 계손사는 노나라의 삼환계손, 맹손, 숙손 가문의 수장이었습니다.

이때 공산주의 불뉴는 삼환과 계손의 폭정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공자는 이미 삼환 등의 군중을 몰아내고 혼란에 빠진 노나라를 바로잡으려 했고, 반역자 공산주의 불뉴는 도덕 정치에 대한 열망으로 인해 몰락한 처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초청에 응하는 문제로 심각한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노나라의 제자였던 맹자와 남궁도의 만류와 적절한 시기에 일어난 기이한 상황 변화로 인해 결국 포기했습니다.

공자는 권력을 휘두르는 계손사를 전복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국정 개혁을 시도했지만, 성취 단계에 이르러 실패했습니다. 그 결과 공자는 기원전 496년 노나라를 떠나 수십 명의 제자들과 함께 현실 정치에서 자신의 학문적 이상을 실현할 현명한 군주를 찾아 뜻밖의 여정을 떠났습니다.

10년이 넘는 시간은 성자 공자에게도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이때 공자는 목숨을 위협받을 위기에 처했고 굴욕과 조롱을 당했습니다. 공자의 도덕 정치는 어느 나라에서도 무시되었습니다. 당시 왕들은 비록 느리더라도 올바른 길을 택하기보다는 국력을 확장하여 쉽게 천하를 정복할 수 있는 부유하고 권력 있는 사람의 방법만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마침내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는 자신의 학문적 이상을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왕자와 군주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귀국한 후 그는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남은 후학들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습니다. 이로써 공자의 정치 생활은 끝나고 이후 교육자로서의 본격적인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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