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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의 즉위와 오배의 난, 러시아와의 갈등

by story7202 2025.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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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의 즉위와 오배의 난

강희제는 여덟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아직 스스로 나라를 다스릴 수는 없었습니다. 원래 어린 황제가 왕위에 오르면 황태후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효강장황후는 강희제가 즉위한 직후 병에 걸려 2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신들 사이에서 수렴청정을 할 것으로 기대되던 효장태후는 수렴청정을 직접 수행하는 대신 네 명의 대신에게 최고의 정책 의권을 부여했습니다. 이에 보정대신들은 그를 보필했습니다.

 

어린 황제가 나중에 내시들에게 현혹될까 두려워 보정 대신들은 순치제때 설립된 동창과 유사한 조직인 십삼아문 폐지했습니다. 모든 조정 대신들은 상당한 권력을 누렸지만 그중에서도 오배가 가장 강력했습니다. 오배는 백성의 땅을 불법으로 획책하는 등 온갖 폭정을 휘둘렀습니다. 그러나 군사력의 장악으로 인해 오배에 비해 권력이 약했지만 아직 친정을 시작하지 않은 강희제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먼저 강희제는 오배의 눈에 띄지 않도록 일부러 장정들을 불러 몽골 씨름을 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짬짬이 나는 시간에 왕실 공부 수업을 듣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강희제의 스승은 명나라 마지막 진사시에 장원을 지낸 제세였습니다.

 

강희제는 오배를 견제하기 위해 또 다른 보정대신인 색닌의 손녀를 황후로 맞이했습니다. 그녀는 강희제의 황후이자 첫 번째 황후인 효성황후 혁사리였습니다.  1667년  7월 14세가 된 강희제는 조상의 예법에 따라 친정 시작하고 성인 의례와 함께 정식 즉위식을 올렸지만, 그해 그를 보호한 색닌이 소극살합에게 강희제를 돌보라고 말하고 사망했습니다. 소극살합은 권력을 잡으려 했지만 위기감을 느낀 오배는 소극살합에게 조작된 반역죄를 씌우고 교수시키고, 그는 조정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소극살을 죽이는 과정에서 오배는 강희재가 이를 반대하는 것을 강압했고 결국 자신의 뜻을 이행했습니다. 강희제는 아직 오배의 세력에 대응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굴복했습니다. 오배의 이러한 행동은 명백한 기망의 범죄였지만, 여전히 약한 강희제는 그를 내버려 두었습니다. 다른 보정대신인 알필용은 오배의 편에 섰지만 오배의 전복을 비판하거나 부추기지도 않았습니다.

 

강희제는 오배가 소극살합을 죽이고 여전히 폭정을 부리는 것을 보고 군사를 이끌고 선수를 때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할머니 효장황후는 이를 막고 상황을 지켜보라고 말했습니다. 어느 날 소극살합을 죽인 오배가 병을 핑계로 두문불출하자 병문안을 갔습니다. 오배가 강희제의 위로를 받고 다시 자리에 누우려 하자 그의 품에서 단도가 발견되었습니다. 강희제는 만주족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단도를 입는 것이 전통이라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오배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강희제는 신중하게 오배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강희제는 색니의 아들 색액도와 힘을 모아 무술을 연마한다는 핑계로 선복영이라는 이름의 친위대를 조직했습니다. 1669년 5월 16일, 오배가 조정에 출석하려 하자 강희제는 순복영을 이용해 오배를 체포할 기회를 잡았습니다. 강희제는 오배가 군주를 사취한 혐의만 있는 기군의 범죄를 포함해 30건의 주요 범죄로 30번이나 사형을 선고받을 자격이 있었지만, 전투에서 선대인 태종과 세조를 가로막은 공을 고려해 유배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독약을 먹게 하고 언제 다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는 여러 대신들의 주장으로 유배되기도 전에 처형당했습니다. 강희제는 오배의 죽음으로 혼란에 빠진 색니의 둘째 아들 색륙도를 조정의 대리인으로 삼아 조정을 안정시켰습니다. 그 결과 강희제는 신하들에게 막강한 권한을 위임하지 않고 강력한 황실 권한을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와의 갈등

1639년부터 1643년까지 청나라는 아무르강 원주민들을 정복했습니다. 1643년 겨울, 바실리 폴랴코프의 코삭 기병대가 헤이룽강 근처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1650년대에는 예로페이 하바로프와 아무르 원주민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1655년 차르 국가는 아무르 지역의 총사령관을 임명했습니다. 러시아와의 국지적 갈등이 계속되자 청나라는 순치 통치 기간 동안 러시아 국경에 접한 조선에 러시아에 맞서 싸울 것을 요청했습니다. 조선은 1654년과 1658년 두 차례 군대를 파견하여 공격적인 조선 정복을 위해 러시아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따라서 강희제 황제의 통치 이전에도 러시아는 군대를 이끌고 만주로 내려오곤 했습니다. 나손 정복 후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러시아는 청나라 북동부를 계속 침략하여 일부는 북만주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 측은 시베리아와 만주의 원주민들을 약탈하고 강간하며 살해하곤 했는데 청나라 북만주 주민들은 이들을 "날것을 먹는 나찰"이라고 불렀습니다. 강희제는 이에 분노하여 러시아에 사과를 요구했고, 러시아는 그에게 무역의 자유를 표명하는 선물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가 송화강으로 세력을 계속 확장하자 강희제는 먼저 국경에 애헌성을 건설했지만 러시아가 계속 야망을 드러내자 강경한 정책을 사용해 러시아 국경 요새인 아르바진을 공격했습니다. 러시아 군대는 아르바진을 점령했지만 후퇴하지 않고 잃어버린 아르바진 요새를 복원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따라서 1689년 청나라와 러시아군이 아무르강 인근에서 국지적으로 휴전을 반복하고 중단하자 강희제 황제는 처숙인 색차도에게 러시아와 협상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네르친스크 조약은 러시아와 청나라 대표들이 네르친스크에서 만나 고르비타 강과 헤이룽강 지류인 스타노보이 산맥을 청과 러시아의 국경으로 설정하면서 체결되었습니다. 이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 간 대등하게 체결된 조약으로, 당시 동방 국가들이 체결한 대국과 소국 간의 조약과는 다른 유럽식 조약이었습니다. 청나라의 제안은 대부분 이곳에서 받아들여져 청나라는 동북부에서 넓은 영토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청과 러시아 간의 무역에서 자유가 보장되었지만 이후 함풍 체제의 통치로 인해 러시아는 황호 전쟁에서 청나라의 원조를 구실로 만주와 연해주의 땅을 많이 되찾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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